정의
조선시대 여수지역에 설치한 전라좌도 해안 경비를 담당했던 수영(水營)
- 약무호남시무국가비석
- 충무공 이순신 영정과 위패
- 호좌수영성지도
- 전라좌수영성도
개설
전라도 지역에 왜구의 침범이 잦아지자 전라좌도 수군을 강화하기 위하여 1479년(성종 10) 정월에 내례만호진(內禮萬戶鎭)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全羅左道水軍節度使營)이 신설되었다.
관련기록
전라좌수영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내례포(內禮浦)로 기록되어 있으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내례만호는 며포(旀浦)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로 보아 며포와 내례만호진은 서로 다른 곳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며포는 대경도와 소경도가 위치한 국동(菊洞)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내례만호진은 여수시 군자동·동산동·관문동·고소동·중앙동의 남쪽에 인접한 해안, 즉 지금의 여수구항(麗水舊港) 일대로 추정되고 있다.
변천
1479년 3월 내례포(內禮浦)를 철폐하여 수군절도영을 설치하고 수군절도사를 두었다. 1485년 3월 성보(城堡) 축조를 시작하여 1491년에 완성하였다. 1498년 절도사 이량이 돌을 운반하여 장군도 왼쪽에 축대를 쌓았다. 1591년 2월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하여 1592년 1월 성문 해자를 축조하고 3월 서문 밖 해자와 성곽을 축조하였으며 4월 품방 해자를 축조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왜군과의 해전에서 여러 번이나 크게 승리한 1593년 7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거제 한산도에 진을 설치하였다. 1598년 절도사 이시언이 충청병마절도사에서 본직으로 옮겨 삼도를 통제할 제영사를 건설하였다. 1599년 이시언이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진해루지에 객사 진남관을 건립하였다.
1664년 절도사 이도빈이 진남관, 망해루, 결승당을 재건하고 화약고, 수군기(水軍器), 호고(戶庫), 해현창(解懸倉)을 새로 지었다. 1673년 절도사 원상이 보군창을 새로 짓고 1684년 절도사 한근이 완경루를 창건하였다. 1694년 절도사 정동망이 지창(紙倉)을 창건하였다. 1716년에 진남관이 화재로 소실되자 1718년 절도사 이제면이 진남관을 중건하였다.
1722년 박세정이 도무창을 창건하고 1729년 절도사 우하영이 주사창을 창건하였다. 1741년에는 전반집물고, 병반집물고, 외창을 창건하였다. 1759년 절도사 이윤덕이 완경루를 재건하고 1767년 절도사 김종만이 보군창을 증창하였다. 1770년 절도사 김상옥이 각 창고의 병기고와 광양둔창, 보선고를 중수하였다.
1773년 절도사 김영수가 체성(體城)을 보축하고 여첩을 개척하였으며 곡성(曲城) 6곳에 포루를 세우고 화기포 6좌를 설치하였다. 1774년에는 동문루를 철문으로 건립하고 장대를 겸하는 동문좌포루, 서문우포루, 수성중군청, 의승청, 수첩군관청, 수성고를 창건하였다. 1895년 전라좌수영을 철폐하였다.
직책 | 직명 | 위치 | 현재위치 |
---|---|---|---|
수군절도사 수군우후 | 전라좌수사 우후 | 전라좌수영(순천내례포) | 여수시 |
수군첨절제사 | 사도진관 사도첨사 | 흥양 | 고흥군 영남면 금사리 |
수군만호 | 회령포만호 | 장흥 | 장흥구 회진면 회진리 |
달량만호 | 영암 |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 | |
여도만호 | 흥양 | 고흥군 점암면 여호리 | |
마도만호 | 강진 | 강진군 대구면 마량리 | |
록도만호 | 흥양 |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 |
발포만호 | 흥양 | 고흥군 도화면 내발리 | |
돌산포만호 | 순천 | 여수시 화양면 용주리 |
참고문헌
- [전라좌수영의 역사와 문화] (여수시·순천대학교박물관, 1993)
- 최인선 외, [전라좌수영성지] (여수시·순천대학교박물관,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