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특별기획 증인] #4 강질용 인터뷰
- 날짜
- 2021.12.16 11:01
- 조회수
- 654
- 등록자
- 윤성현
0:05
여수10.19 특별법 제정 촉구 특별기획 증인 여수mbc
0:07
네번째 증인 강질용 순천낙안 신전마을 희생자 유족
0:11
Q) 그날은 어땠나요?
49년 음역으로 8월 열이렛날 저녁 10시가 넘어서라고 이야기를 들었어요 12시전 일찍자는 사람들은 잘 정도. 그런 시각에
0:29
갑자기 총성이 울리면서 동네분들을 군인들이 전부 전부 경찰 아니고 순수한 군인들. 14연대 소속이었다고 그래요
0:41
군인들이 이 마을 주변을 전부 에워싸고 총성을 울리면서 집합을 싹 시킨거예요.
0:56
집합을 어떻게 했냐면, 신작로 저쪽에 그 이유가 뭐 때문에, 마을에 군인들이 들어와서 집합을 시켰냐면
1:11
문홍주라는 그때 당시 11살 먹은 사촌 큰집 형님이랑 같은 또래. 그때당시 사건당시 11살 먹은(아이가)
1:26
반란군 연락병을 하다가 총살을 입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다리를 다쳐서 반란군이 와서
1:38
그때당시 마을 이장집에 맡겨서 당신들이 이 아이를 아무런 사고없이 잘 치료해서
1:52
책임지고 그렇게 해라 그렇게 해서 안할수는 없고 갸를 이장집에 데려다 놓고 밥도주고 뭣도주고 그러다보니까 치료도 됐겠죠 큰부상이 아니여서 그랬는지 몰라도
2:05
불쌍하다고 이웃사람들 이곳저곳에서 옷도주기도 하고 가을철이 되고 그러면 과일, 감같은것도 주고 이랬어요
2:22
그런데 걔가 자기 할아버지 조부가 그때 당시 쌍암에, 쌍암면 소재지에서 약국을 하고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자주 왔다갔다 했는데 가는 도중에 이야기도 하고 승주 남강마을 앞에서 시비가, 싸움이 벌어져서..
2:50
우리 친구를 데리고 와서 너희들 가만히 안둔다 이런식으로 얘기했어요
3:02
그러니까 지나가던 분이 누구였냐면 그때당시 쌍암면사무소에 근무하는 사람인데 얘기가 말하는것이 상당히 이상하다 생학해서
3:13
이야기를 들어보고 반란군의 소속이구나 연락병이구나 해서 경찰서에 연락을 해서 걔를 체포를 하고 그 얼마후에 군인들이 걔를 데리고 온거예요
3:29
군인들이 다 소집을 해놓고 죄있는 사람들만, 죄있는 사람들은 실제 반란군들은 전부 도망가버리고 있겠습니까?
3:41
이제 죄없는 사람만. 애기 밥한그릇주고 뭐 음식좀 줬다고 해서 죄라고 생각도 안해봤죠.
3:51
그런데 싹 소집을 해서 그렇게 내가 뭐때문에 이쪽이냐. 누가 뭐 줬습니다. 자진해서 말한 사람, 주민은 없었겠죠 군인들이 누가누가 줬어 (물어보니까)
4:03
(그아이가)손가락질 하면서 저사람은 밥주고, 저사람은 빨래빨아주고.. 발로 톡톡 쳐버리면서 그런 사람을 색출해내서 한쪽으로 구분하는거예요
4:17
그때까지만 해도 죽이려고 하는지 생각을 안했죠 거기서도 좀 의심을,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해서
4:25
빠져나온 사람도 있었다고 해요. 고랑 저쪽으로 들어가서 산사람도있고 그렇다고 하는데...
4:31
그날 마을사람 22명이 총상됐다. 그중에는 4살이 채 안된 어린아이도 3명이나 있었고 67살 되는 노인도 있었다
4:38
뭔 법이 그런 무법이 있었을까요. 살인을 시켜도 재판을 하고 심문을 하고 조서를 받아서 사형을 시켜야지, 죄의 댓가를 무조건 손가락질 하나로 해서 주민들을 학살시키고... 지금 생각해보면 어디 애들 장난도 아니고 미개국에서도 그런일이 없었을 거예요.
5:05
Q) 마을에 불도 질렀죠?
유일하게 이쪽은 외따로 떨어져서 그랬는지 집이 좀 안좋아서 허술하고 적었어요. 우리가 최근에도 이집 한채만 놔두고 나머지는 전부 전소시켜서 불내서 전부 전소가 되어버렸어요 이집 한채만 남고.
5:24
빼내지도 못하고. 옷같은건 입을 것 그런거 하나정도만 빼냈다고 그래요
5:32
사건 당시 강질용씨는 고작 100일된 갓난아이였다.
온 마을이 불타는 바람에 아버지 사진 한장도 건질 수 없었고 강질용씨는 한평생 아버지의 얼굴조차 모르고 살아야 했다.
5:41
Q) 아버님 얼굴 모른다고 하셨잖아요. 사진도 안남고..
사진도 안남고, 그러니까 너무 한스럽고 그래요. 돌아가신 뒤라도 어떻게 돌아가시든지 간에 얼굴이라도 얼굴도 볼수가 없는 그런 나이기 때문에
5:54
사진이라도 봤으면, 이렇게 생겼구나 어버지가 할텐데.. 너무 그게 참 한스럽습니다. 사진한장도 없이 이렇게 남김없이 되어버린것이..
6:12
사진은 있었겠지만 불에 타서 전소를 해버렸기 때문에 다 타버린 것이죠.
6:25
Q) 마을사람들은 다 타버렸으면 어디가서..
전부 집도 태워버리고 부모 형제도 잃어버리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다들 친척집이나 친척이 없는 사람은 아는 지인들 집으로나 그렇게 다 피난을 갔었다 그래요
6:53
우리집 같은 경우는 숙부님이 작은 아버지가 같은면에 내동마을이라고 거기서 약 1년간 정도
7:07
집을 새로 짓기 전까지는 우리같은 경우는 그렇게 살고. 남들도 다 친척집에서 그렇게 살았다고 그럽니다. 인근마을로 가기도 하고
7:18
제일가까운 금산마을이라고 그쪽에도 여러사람들이 작은방에서 세 얻어서 들어가듯이 살았습니다.
7:33
아궁이 하나 받치고 밥만 어떻게 해먹고 잠만자고 그럴 정도였죠 뭐
7:39
Q) 가족중에 또 희생되신 분이 있나요?
우리 아버지하고 큰아버지, 큰어머니, 이마을에 큰집하고 우리 집 가운데고, 막내 작은 아버지는 낙안쪽에 계셨어요
7:57
그때 당시 분가를 해서 계셨으면 거기도 전부 사형당하고 그랬겠죠 다행히 없어서 그렇지.. 큰아버지, 큰어머니 두분다 또, 그때 당시 11살먹은 사촌누나,
8:20
그리고 고숙, 아버지 형제 그때당시 그분이 마을 이장을 했대요. 그래서 고문깨나 하고, 실토를 안하고 뭐 한것이 없는데..
8:35
그래서 물에다 쳐넣고 그때 이야기 어머니 얘기들어보면.. 그래도 안한것을 했다고 억지로 말할 수 없잖아요 결국은 고문을 당하니까 대답할 겨를도 없이 다 죽어가고 그러니까..
8:52
실토할 일은 없죠 밥해주고 그런일 밖에 없으니까.. 제일 피해가 많아요 우리집안이..
9:04
큰아버지, 큰어머니, 사촌누나, 고숙, 우리아버지..
9:09
Q) 추석이 추석답지 않았겠어요?
추석명절은 명절이라도 항시 슬픔에 젖어있죠.. 제사가 거의 우리어렸기 때문에, 지금은 70년이 넘었기때문에..
9:27
그때 당시만 해도 추석이 돌아와도 그렇게 명절이라는 그런 즐거운 마음도 사실없고, 우리마을은...
9:42
슬픔 속에 과거를 회상해 보면 그랬죠.. 추석답지 않게 명절이 지나가고 그랬어요
9:54
Q) 유년시절은 어떠셨어요?
나는 6월 7일에 음력으로 출생을 했고, 음력으로 8월 열이렛날이기 때문에 그때 당시 음력 윤달이 7월에 들었다고 해요. 한 백여일 남짓, 그정도일 때죠. 내가 대여섯살
10:20
철이 좀 들때부터 아버지는 어디가서 있냐고 어머니한테 물어보기도 하고 내 위로 누나가 둘 있어요. 그때 당시 그러니까 기억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백여일 남짓인데
10:44
학교들어가면서 어머니한테, 누나들한테 아버지 어디 있냐고 그러고 물어보고 그랬어요.
10:53
어렸을때는 말해봤자 잘 모르기때문에 철이 들어서 주위사람들, 동네사람들, 어머니 한테서 이야기를 듣고 그런 사변이 일어났구나 생각했죠.
11:10
우리어머니도 고생많이 했고.. 저도 진학도, 배우고 싶은데 학교도 못가고 초등학교만 나와서 중학교를 친구들이 동네에서 가면 그렇게 부럽고 배우고 싶고 했지만..
11:39
어디 객지를 나갈수도 내가 가장이 되어버린것 아닙니까 누나들은 일찍시집가버리고.. 오로지 내가 농사를 지어줘야죠
11:59
Q) 아버님은 어떤분이셨어요?
주민들 이야기 들어보면 우리 아버지께서 그렇게 부지런하셨다네요. 자기일은 밤으로나 언제로 다 해버리고 주민들 일이나 이런것은 발 벗고 나서고 그리고
12:20
그때 당시만 해도 새밑고랑 내고 그런거 전부 아버지 혼자 다해버리고. 그렇게 부지런했다고 해요
12:32
학교다니면서도 아버지가 계셨으면 내가 여기서 이렇게 있겠냐.. 농사짓고 살겠냐 아버지 주민들 이야기를 들었을때도 그렇게 근면했으면 살림을 모으고..
얼마나 많이 벌었겠어요
12:56
우리마을에서 같은해 출생자가 9명이나돼요 그런데 공직자로 있는 사람들이 우리동네에서 5명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곳으로 이주를 해버렸고
13:19
그런데 그중에서도 아버지가 생존해계셨더라면 내가 너희들처럼(되었을텐데..) 그런게 너무 한스럽고 그러죠
13:32
저런사람들 저런친구들은 부모덕을 보고 부모가 생존해계서서 그런 사건을 안당하니까 진학을 하고, 우리처럼, 나처럼 고생도 안하고..
13:47
고생하는것을 자신을 원망해보고 그런적은 없었지만 내복이 그만큼인가보다 생각을 하고..
14:00
Q) 마을사람들, 그동안 많이 떠났죠?
많이 떠났죠.. 여기 지금 피해보신 분들만 하더라도 한 20여가구 이상이 떠났죠
14:18
Q) 45호 정도가 있었는데 그중에 20여가구가 떠나버린거예요?
사변당시 바로 그해. 바로그때부터 가버린 사람들이 있고 가족이 없어져 버리니까..
14:34
지금 현재 우리주민등록상으로는 27세대로 되어있는데 실제로 여기서부터 사변 난 전에 여기 생존해 계신분들은 15호도 못됩니다.
14:58
(절반도 안된..) 네 절반도 안되죠 (돌아가셔버리고 없고... 그럼 마을에 한 3분의 2가 떠나버렸다는 말씀이시죠 ) 네
돌아가셔버리고 없고 아들딸들은 객지에서.. 여기는 고향이 없어져 버리죠.
15:18
Q) 그럼 이쪽분들 중에는 몇분이나 남아계세요?
고향이라고만 하지 유족으로는 다섯세대 남아있어요 부모 형제를 잃어버리고 여기가 뭐 좋아서 농토나 터전이나 많고 그러면 살아질지도 모르는데 전망이 없기때문에..
15:46
Q) 처형장에 학교를 지었네요?
56년도에 이 학교가 건립이 됐어요. 그전에는 여기가 전부 논이었는데 우리 지역민들이 농토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우리 어머니부터 한 300평이상 기증해서
16:03
여러사람들이 기증을 해서 지역을 위해서 학교를 이쪽에 유치해야겠다 이설을 해야겠다고.. 봉사심이 좋은 분들이 자기논을 내놓으면서 (학교를 지었죠)
16:19
강질용씨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지난 과거사 위원회 조사를 통해 민사보상을 받았다
16:25
Q) 한이 좀 풀리셨나요?
저번 과거사위원회 판결난 것 가지고 난 보상이야.. 뭐 만족하겠습니까 얼마를 달라 그렇지는 않겠지만 보상도 미비해요
16:35
그동안에 고통받고, 못배우고 혼자 가장노릇 하다시피하면서 살아온 이 과정이 70년간을 그렇게 살아온 것이 뭣이 그거가지고 만족할게 있습니까
16:49
앞으로라도 우선은 명예획복은 되어야 하고 특별법이 제정되어서 정말 국가에서 위령 공원도 세워주고, 여기 주민들은 죄없이 국가 잘못으로 이렇게 사살시켰다
17:11
대통령이 사과해야죠. 우리 유족들 한테 정말로 잘못한 것을 유족들한테 (사과)해주고 명예회복도 (해주고..)
17:25
제21대 국회에서는 여순 10.19특별법이 제정되길 소망합니다.
여수10.19 특별법제정촉구 특별기획 증인 여수MBC
(본 영상은 마포꽃점 폰트로 제작되었습니다.)
link|https://www.youtube.com/watch?v=EgsdIqo1-5A&list=PLHEqzPr4LKU3sthgDAksOCciUJMUQwxB_&index=40|[증인 풀버전] #4 강질용 인터뷰 |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 촉구 특별기획||https://i.ytimg.com/vi/EgsdIqo1-5A/maxresdefault.jpg|
여수10.19 특별법 제정 촉구 특별기획 증인 여수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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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증인 강질용 순천낙안 신전마을 희생자 유족
0:11
Q) 그날은 어땠나요?
49년 음역으로 8월 열이렛날 저녁 10시가 넘어서라고 이야기를 들었어요 12시전 일찍자는 사람들은 잘 정도. 그런 시각에
0:29
갑자기 총성이 울리면서 동네분들을 군인들이 전부 전부 경찰 아니고 순수한 군인들. 14연대 소속이었다고 그래요
0:41
군인들이 이 마을 주변을 전부 에워싸고 총성을 울리면서 집합을 싹 시킨거예요.
0:56
집합을 어떻게 했냐면, 신작로 저쪽에 그 이유가 뭐 때문에, 마을에 군인들이 들어와서 집합을 시켰냐면
1:11
문홍주라는 그때 당시 11살 먹은 사촌 큰집 형님이랑 같은 또래. 그때당시 사건당시 11살 먹은(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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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군 연락병을 하다가 총살을 입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다리를 다쳐서 반란군이 와서
1:38
그때당시 마을 이장집에 맡겨서 당신들이 이 아이를 아무런 사고없이 잘 치료해서
1:52
책임지고 그렇게 해라 그렇게 해서 안할수는 없고 갸를 이장집에 데려다 놓고 밥도주고 뭣도주고 그러다보니까 치료도 됐겠죠 큰부상이 아니여서 그랬는지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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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하다고 이웃사람들 이곳저곳에서 옷도주기도 하고 가을철이 되고 그러면 과일, 감같은것도 주고 이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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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걔가 자기 할아버지 조부가 그때 당시 쌍암에, 쌍암면 소재지에서 약국을 하고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자주 왔다갔다 했는데 가는 도중에 이야기도 하고 승주 남강마을 앞에서 시비가, 싸움이 벌어져서..
2:50
우리 친구를 데리고 와서 너희들 가만히 안둔다 이런식으로 얘기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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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지나가던 분이 누구였냐면 그때당시 쌍암면사무소에 근무하는 사람인데 얘기가 말하는것이 상당히 이상하다 생학해서
3:13
이야기를 들어보고 반란군의 소속이구나 연락병이구나 해서 경찰서에 연락을 해서 걔를 체포를 하고 그 얼마후에 군인들이 걔를 데리고 온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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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이 다 소집을 해놓고 죄있는 사람들만, 죄있는 사람들은 실제 반란군들은 전부 도망가버리고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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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죄없는 사람만. 애기 밥한그릇주고 뭐 음식좀 줬다고 해서 죄라고 생각도 안해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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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싹 소집을 해서 그렇게 내가 뭐때문에 이쪽이냐. 누가 뭐 줬습니다. 자진해서 말한 사람, 주민은 없었겠죠 군인들이 누가누가 줬어 (물어보니까)
4:03
(그아이가)손가락질 하면서 저사람은 밥주고, 저사람은 빨래빨아주고.. 발로 톡톡 쳐버리면서 그런 사람을 색출해내서 한쪽으로 구분하는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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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만 해도 죽이려고 하는지 생각을 안했죠 거기서도 좀 의심을,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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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져나온 사람도 있었다고 해요. 고랑 저쪽으로 들어가서 산사람도있고 그렇다고 하는데...
4:31
그날 마을사람 22명이 총상됐다. 그중에는 4살이 채 안된 어린아이도 3명이나 있었고 67살 되는 노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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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법이 그런 무법이 있었을까요. 살인을 시켜도 재판을 하고 심문을 하고 조서를 받아서 사형을 시켜야지, 죄의 댓가를 무조건 손가락질 하나로 해서 주민들을 학살시키고... 지금 생각해보면 어디 애들 장난도 아니고 미개국에서도 그런일이 없었을 거예요.
5:05
Q) 마을에 불도 질렀죠?
유일하게 이쪽은 외따로 떨어져서 그랬는지 집이 좀 안좋아서 허술하고 적었어요. 우리가 최근에도 이집 한채만 놔두고 나머지는 전부 전소시켜서 불내서 전부 전소가 되어버렸어요 이집 한채만 남고.
5:24
빼내지도 못하고. 옷같은건 입을 것 그런거 하나정도만 빼냈다고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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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당시 강질용씨는 고작 100일된 갓난아이였다.
온 마을이 불타는 바람에 아버지 사진 한장도 건질 수 없었고 강질용씨는 한평생 아버지의 얼굴조차 모르고 살아야 했다.
5:41
Q) 아버님 얼굴 모른다고 하셨잖아요. 사진도 안남고..
사진도 안남고, 그러니까 너무 한스럽고 그래요. 돌아가신 뒤라도 어떻게 돌아가시든지 간에 얼굴이라도 얼굴도 볼수가 없는 그런 나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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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라도 봤으면, 이렇게 생겼구나 어버지가 할텐데.. 너무 그게 참 한스럽습니다. 사진한장도 없이 이렇게 남김없이 되어버린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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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있었겠지만 불에 타서 전소를 해버렸기 때문에 다 타버린 것이죠.
6:25
Q) 마을사람들은 다 타버렸으면 어디가서..
전부 집도 태워버리고 부모 형제도 잃어버리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다들 친척집이나 친척이 없는 사람은 아는 지인들 집으로나 그렇게 다 피난을 갔었다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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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같은 경우는 숙부님이 작은 아버지가 같은면에 내동마을이라고 거기서 약 1년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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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새로 짓기 전까지는 우리같은 경우는 그렇게 살고. 남들도 다 친척집에서 그렇게 살았다고 그럽니다. 인근마을로 가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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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가까운 금산마을이라고 그쪽에도 여러사람들이 작은방에서 세 얻어서 들어가듯이 살았습니다.
7:33
아궁이 하나 받치고 밥만 어떻게 해먹고 잠만자고 그럴 정도였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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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가족중에 또 희생되신 분이 있나요?
우리 아버지하고 큰아버지, 큰어머니, 이마을에 큰집하고 우리 집 가운데고, 막내 작은 아버지는 낙안쪽에 계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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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당시 분가를 해서 계셨으면 거기도 전부 사형당하고 그랬겠죠 다행히 없어서 그렇지.. 큰아버지, 큰어머니 두분다 또, 그때 당시 11살먹은 사촌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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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고숙, 아버지 형제 그때당시 그분이 마을 이장을 했대요. 그래서 고문깨나 하고, 실토를 안하고 뭐 한것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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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물에다 쳐넣고 그때 이야기 어머니 얘기들어보면.. 그래도 안한것을 했다고 억지로 말할 수 없잖아요 결국은 고문을 당하니까 대답할 겨를도 없이 다 죽어가고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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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토할 일은 없죠 밥해주고 그런일 밖에 없으니까.. 제일 피해가 많아요 우리집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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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버지, 큰어머니, 사촌누나, 고숙, 우리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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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추석이 추석답지 않았겠어요?
추석명절은 명절이라도 항시 슬픔에 젖어있죠.. 제사가 거의 우리어렸기 때문에, 지금은 70년이 넘었기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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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당시만 해도 추석이 돌아와도 그렇게 명절이라는 그런 즐거운 마음도 사실없고, 우리마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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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속에 과거를 회상해 보면 그랬죠.. 추석답지 않게 명절이 지나가고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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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유년시절은 어떠셨어요?
나는 6월 7일에 음력으로 출생을 했고, 음력으로 8월 열이렛날이기 때문에 그때 당시 음력 윤달이 7월에 들었다고 해요. 한 백여일 남짓, 그정도일 때죠. 내가 대여섯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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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 좀 들때부터 아버지는 어디가서 있냐고 어머니한테 물어보기도 하고 내 위로 누나가 둘 있어요. 그때 당시 그러니까 기억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백여일 남짓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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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들어가면서 어머니한테, 누나들한테 아버지 어디 있냐고 그러고 물어보고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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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때는 말해봤자 잘 모르기때문에 철이 들어서 주위사람들, 동네사람들, 어머니 한테서 이야기를 듣고 그런 사변이 일어났구나 생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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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어머니도 고생많이 했고.. 저도 진학도, 배우고 싶은데 학교도 못가고 초등학교만 나와서 중학교를 친구들이 동네에서 가면 그렇게 부럽고 배우고 싶고 했지만..
11:39
어디 객지를 나갈수도 내가 가장이 되어버린것 아닙니까 누나들은 일찍시집가버리고.. 오로지 내가 농사를 지어줘야죠
11:59
Q) 아버님은 어떤분이셨어요?
주민들 이야기 들어보면 우리 아버지께서 그렇게 부지런하셨다네요. 자기일은 밤으로나 언제로 다 해버리고 주민들 일이나 이런것은 발 벗고 나서고 그리고
12:20
그때 당시만 해도 새밑고랑 내고 그런거 전부 아버지 혼자 다해버리고. 그렇게 부지런했다고 해요
12:32
학교다니면서도 아버지가 계셨으면 내가 여기서 이렇게 있겠냐.. 농사짓고 살겠냐 아버지 주민들 이야기를 들었을때도 그렇게 근면했으면 살림을 모으고..
얼마나 많이 벌었겠어요
12:56
우리마을에서 같은해 출생자가 9명이나돼요 그런데 공직자로 있는 사람들이 우리동네에서 5명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곳으로 이주를 해버렸고
13:19
그런데 그중에서도 아버지가 생존해계셨더라면 내가 너희들처럼(되었을텐데..) 그런게 너무 한스럽고 그러죠
13:32
저런사람들 저런친구들은 부모덕을 보고 부모가 생존해계서서 그런 사건을 안당하니까 진학을 하고, 우리처럼, 나처럼 고생도 안하고..
13:47
고생하는것을 자신을 원망해보고 그런적은 없었지만 내복이 그만큼인가보다 생각을 하고..
14:00
Q) 마을사람들, 그동안 많이 떠났죠?
많이 떠났죠.. 여기 지금 피해보신 분들만 하더라도 한 20여가구 이상이 떠났죠
14:18
Q) 45호 정도가 있었는데 그중에 20여가구가 떠나버린거예요?
사변당시 바로 그해. 바로그때부터 가버린 사람들이 있고 가족이 없어져 버리니까..
14:34
지금 현재 우리주민등록상으로는 27세대로 되어있는데 실제로 여기서부터 사변 난 전에 여기 생존해 계신분들은 15호도 못됩니다.
14:58
(절반도 안된..) 네 절반도 안되죠 (돌아가셔버리고 없고... 그럼 마을에 한 3분의 2가 떠나버렸다는 말씀이시죠 ) 네
돌아가셔버리고 없고 아들딸들은 객지에서.. 여기는 고향이 없어져 버리죠.
15:18
Q) 그럼 이쪽분들 중에는 몇분이나 남아계세요?
고향이라고만 하지 유족으로는 다섯세대 남아있어요 부모 형제를 잃어버리고 여기가 뭐 좋아서 농토나 터전이나 많고 그러면 살아질지도 모르는데 전망이 없기때문에..
15:46
Q) 처형장에 학교를 지었네요?
56년도에 이 학교가 건립이 됐어요. 그전에는 여기가 전부 논이었는데 우리 지역민들이 농토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우리 어머니부터 한 300평이상 기증해서
16:03
여러사람들이 기증을 해서 지역을 위해서 학교를 이쪽에 유치해야겠다 이설을 해야겠다고.. 봉사심이 좋은 분들이 자기논을 내놓으면서 (학교를 지었죠)
16:19
강질용씨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지난 과거사 위원회 조사를 통해 민사보상을 받았다
16:25
Q) 한이 좀 풀리셨나요?
저번 과거사위원회 판결난 것 가지고 난 보상이야.. 뭐 만족하겠습니까 얼마를 달라 그렇지는 않겠지만 보상도 미비해요
16:35
그동안에 고통받고, 못배우고 혼자 가장노릇 하다시피하면서 살아온 이 과정이 70년간을 그렇게 살아온 것이 뭣이 그거가지고 만족할게 있습니까
16:49
앞으로라도 우선은 명예획복은 되어야 하고 특별법이 제정되어서 정말 국가에서 위령 공원도 세워주고, 여기 주민들은 죄없이 국가 잘못으로 이렇게 사살시켰다
17:11
대통령이 사과해야죠. 우리 유족들 한테 정말로 잘못한 것을 유족들한테 (사과)해주고 명예회복도 (해주고..)
17:25
제21대 국회에서는 여순 10.19특별법이 제정되길 소망합니다.
여수10.19 특별법제정촉구 특별기획 증인 여수MBC
(본 영상은 마포꽃점 폰트로 제작되었습니다.)
link|https://www.youtube.com/watch?v=EgsdIqo1-5A&list=PLHEqzPr4LKU3sthgDAksOCciUJMUQwxB_&index=40|[증인 풀버전] #4 강질용 인터뷰 |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 촉구 특별기획||https://i.ytimg.com/vi/EgsdIqo1-5A/maxresdefault.jpg|
| 저자명 | 여수mbc |
|---|---|
| 생산연도 | 2020. 1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