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70주년 특집 5부작 <가려진 시간, 고여 있는 눈물> 2부
- 날짜
- 2021.10.13 13:32
- 조회수
- 568
- 등록자
- 윤성현
0:05
여순사건 70주기 특별기획 가려진 시간, 고여있는 눈물
0:10
우리마을은 그날이후로 추석명절이 없어졌습니다.
0:22
2부 추석없는 마을
0:32
(전남순천시 낙안면 신전마을)
장홍석 여순사건 당시 2세 - 1949년도 그때는 농사만 알고 형제간처럼 아주 오순도순 살기좋은 마을이였어요
0:41
그러던 차에 여순사건이 발발하고 밤만되면 반란군들이 와서(산에서 내려와 집안에) 식량이 있으면 있는대로 다 털어가고..
0:50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에 시작되었고
0:58
여수는 10월 27일, 진압군이 완전히 점령합니다. 그런데 10월 27일에 여순사건이 끝난것은 아닙니다.
1:09
여순사건은 (발발이듬해인)1949년 내내 지속이 됩니다. 왜냐하면 14연대 군인들이 지리산 등지로 입산을 했고 거기서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게 되고
1:23
이에따라 진압군은 토벌작전을 계속 진행하게 됩니다.
1:27
(1949년 추석 이튿날 신전마을 비극의 밤 1949년 추석 이튿날 빨치산(반군)이 데려온 부상당한 소년을 챙겼다는 이유로 순천 신전마을 주민들은 이자리에서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1:44
저는 그때 3살이었는데 형수등에 업혀 죄인 줄에 앉혀졌습니다. 형수는 젊고 하니까 앉아서 자꾸 나오면은 몇번을 그렇게 해가지고 다시가고 다시오고 해서 결국에는 죽지않고 겨우 오고..
1:53
(죄인줄에서 벗어나기위해 안간힘을 쓴 형수 젊은 형수의 기지로 죽음의 고비를 넘긴 세사람)
2:02
그때 조카가 형수 뱃속에 있었는데 세사람이 산겁니다.그리고 어머니는 그대로 다 있고..
2:12
(어머니는 끝내 그죽음의 줄을 벗어나지 못했다)
2:15
엄마등에 업힌 세살 아이부터 60대 노인까지 그들은 소년에게 올벼쌀을 주거나,
2:25
홍시를 건넨사람들 영문도 모른채 죄인이 된 22명의 마을주민이 끌려간 곳은 늘 지나치던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이웃집 마당
2:32
진압군의 총부리는 무고한 22명의 목숨을 한순간에 앗아갔다 총성이 멈춘 비극의 현장...
2:40
(총을 맞고 쓰러진)사람들에게 기름을 뿌리고 다 화장을 시키는 거예요
2:45
(형체를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훼손돼버린 망자들) 자기 가족인데도 알아볼 수가 없어서.. 비녀 랄지 가락지 랄지 몸의 특징들을 봐서 우리어머니는 비녀를 보고 찾았다고 해요
2:58
너무나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그 군인들 가운데서도 걱정을 많이 하더라는 거예요 (진압군조차 두려움에 떨게 한 신전마을의 비극) 큰일났다고 자기들끼리..
3:10
그래놓고는 일부군인들은 그도 모자라서 집 있는대로 천하에 다 불을 놓고 다녔어요 (온 마을을 불바다로 만든 일부군인들) 그때 우리마을은 지금도 빈 터만 남았어요(마을은 잿더미가 되고 마을사람들은 한순간에 빈털털이가 되고 말았다) 옷가지며 식량이며 모든것이 하룻저녁에 가족이며 다 잃었어요
3:34
그게 남아있는 가족들 남아있는 마을분들이 입이있어도 말을 못하고 혼이나갔어요
3:39
( 피붙이의 처참한 죽음을 바로 눈앞에서 목도해야했던 현실) 너무나도 끔찍한 일을 당했기때문에 사람이 혼이나가.. 집이있어 먹을것이 있어.. 시체들을 땅에다 묻어야 되는데 다 불을 태웠으니 그 묻을 삽 괭이 이런것마저 없어져서
4:00
(마을에는 무덤을 팔 삽하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연장을 빌리고 인부를 사고 마을사람들이 혼이 나가버렸기 때문에
4:12
(거짓말 같은 현실앞에 넋이 나간 마을사람들) 그 피해를 안본사람들이라도 할수있는게 없어서 그래서 이웃마을에 가서 인부가 오고..
4:23
(집 마당엔 22명의 피가 낭자했고)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고 사람을 태웠으니 그 피비린내, 사람탄냄새가
4:34
(온마을은 죽음의 냄새로 뒤덮였다) 어떻게 코에 역겨웠던지 이 마을앞에 코를 들고 다니기가 힘들정도로...
4:45
(그후 마을에선)빨갱이에 빨자 순사에 순자만 들어도 몸서리를 치고..
4:51
김득중 국사편천위원회 편사연구관 - (희생된 사람들이)빨갱이 였기때문에 죽인것이 아니라 죽인다음에 그들에게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였죠
4:58
한홍구 역사학자 / 성공회대교수 -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힌순간 우리사회에서 제거해야할 대상이 되는거죠 빨갱이 가족이라고 하면 입 다물고 살았어야 했고 연좌제라든가, 신원조회라든가 그런게 (그동안 우리사회에서)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까
5:12
한글도 깨우치지 못하고,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분들이 빨갱이가 뭔지 좌익이 뭔지 우익이 뭔지 뭘알겠습니까
5:18
우리마을은 그때부터 추석이 없어졌습니다. 한집 건너 한집이 제삿집이였고.. 집집마다 울음소리가 들리는 추석이 되어버렸어요..
5:31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마을을 떠나갔다)
5:35
신전마을 주민이었던 홍동호씨는 저보다 네살이 위입니다. 위인데 그분은 아버지, 어머니, 누나, 동생.. 동생이 겨우 3살이였는데 4명을 잃어버리고 7살에 혼자남았어요
5:50
(한순간에 고아가 된 소년) 거지생활을 했어요 밥얻어먹다가 조금 크니까 쓰레기 줍는 넝마지.. 청년기때에는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내가 뭣을 보고 사냐
6:07
세번을 자살기도 했는데 곧 죽을 순간에 등산객이 구해주고 살았어요.. 좀 남들처럼 살아보려고 갖은 고생을 다 해서 몸이 망가져서 아파서 작년에 돌아가셨습니다. (혈혈단신으로 마을을 떠났던 홍동호씨는 지난해 고인이 되셨다)
6:25
이영일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소장 - 젊은이들이 취업이 안되요 중동에 취업은 안되는데 월남전 파병은 선뜻 받아주는걸 보면서 유족들이 '중동에는 돈벌러가는곳이라 (안됐고) 월남전은 죽으러 갈수도 있는 자리니 허용해준 것이다'
6:49
라는 이야기가 유족들의 아픔과 애환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족들 대부분이 못입고 못배우고 못먹는 3무 상황에서 사회적 약자로 전락하는 비참한 상황들에 처해지게 됐습니다.
7:13
(신전마을 초입에 방치된 여순사건 표지판처럼 점점 잊혀져가는 그날의 기억 하지만 장홍석씨에겐 어머니를 떠올리게하는 단 하나의 흔적이다. )
7:30
우선 많이 보고싶었다고 얘기하고 싶고요.. 또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억울한 누명으로 비명에 가신 나의 어머니... 지금 민주화가 된 이땅에서..
8:02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정부가 있다고 하는데도 그런 사건을 지금도 외면을 하고(여순사건의 실체가 외면당하는 뼈아픈 현실...)
8:12
나몰라라 하고 그런 것들을 우리 자식들이 우리 이웃들이(자식으로서.. 그아픔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8:21
그거 하나 지금까지 해결하지도 못하고 이런 긴긴 세월을 보내는 것이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여순사건에 대한 의견과 피해사례 제보, 본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소감을 보내주시면 향후 제작에 반영하겠습니다 .여수 mbc홈페이지 시청자의견 게시판 / 여수mbc페이스북으로 많은 참여 바랍니다.
8:46
부용산 - 박기동 작사, 안성현 작곡, 윤선애 노래 / 요절한 여동생을 부용산에 묻은 슬픔을 표현한 시에 곡을 붙임 빨치산이 즐겨 불렀다하여 금지곡으로 취급받은 노래
부용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채 시든 장미는 흙으로 돌아갔네
제작지원 gs칼텍스, LG화학, LOTTE ADVANCED MATERIALS
기획 김지홍 / 구성 이혜련, 정안형 / 카메라 송정혁, 최재훈, 신대호 / 오디오 양원석, 임솔빛, 장대은
운전 김득중, 옥지수 / 음악 이수환 / 사진 고 이경모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 자료협조 제주MBC
타이틀그래픽 최윤정 / 행정 문은호, 신진영, 이가영
연출 이동신
제작 여수mbc
1948.10.19 여순사건 70주기 특별기획 가려진 시간, 고여 있는 눈물 2부 추석없는 마을link|https://www.youtube.com/watch?v=3kzgSGPbvE0|[여순사건 70주기 특별기획2]
여순사건 70주기 특별기획 가려진 시간, 고여있는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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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은 그날이후로 추석명절이 없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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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추석없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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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순천시 낙안면 신전마을)
장홍석 여순사건 당시 2세 - 1949년도 그때는 농사만 알고 형제간처럼 아주 오순도순 살기좋은 마을이였어요
0:41
그러던 차에 여순사건이 발발하고 밤만되면 반란군들이 와서(산에서 내려와 집안에) 식량이 있으면 있는대로 다 털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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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에 시작되었고
0:58
여수는 10월 27일, 진압군이 완전히 점령합니다. 그런데 10월 27일에 여순사건이 끝난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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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은 (발발이듬해인)1949년 내내 지속이 됩니다. 왜냐하면 14연대 군인들이 지리산 등지로 입산을 했고 거기서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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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따라 진압군은 토벌작전을 계속 진행하게 됩니다.
1:27
(1949년 추석 이튿날 신전마을 비극의 밤 1949년 추석 이튿날 빨치산(반군)이 데려온 부상당한 소년을 챙겼다는 이유로 순천 신전마을 주민들은 이자리에서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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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때 3살이었는데 형수등에 업혀 죄인 줄에 앉혀졌습니다. 형수는 젊고 하니까 앉아서 자꾸 나오면은 몇번을 그렇게 해가지고 다시가고 다시오고 해서 결국에는 죽지않고 겨우 오고..
1:53
(죄인줄에서 벗어나기위해 안간힘을 쓴 형수 젊은 형수의 기지로 죽음의 고비를 넘긴 세사람)
2:02
그때 조카가 형수 뱃속에 있었는데 세사람이 산겁니다.그리고 어머니는 그대로 다 있고..
2:12
(어머니는 끝내 그죽음의 줄을 벗어나지 못했다)
2:15
엄마등에 업힌 세살 아이부터 60대 노인까지 그들은 소년에게 올벼쌀을 주거나,
2:25
홍시를 건넨사람들 영문도 모른채 죄인이 된 22명의 마을주민이 끌려간 곳은 늘 지나치던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이웃집 마당
2:32
진압군의 총부리는 무고한 22명의 목숨을 한순간에 앗아갔다 총성이 멈춘 비극의 현장...
2:40
(총을 맞고 쓰러진)사람들에게 기름을 뿌리고 다 화장을 시키는 거예요
2:45
(형체를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훼손돼버린 망자들) 자기 가족인데도 알아볼 수가 없어서.. 비녀 랄지 가락지 랄지 몸의 특징들을 봐서 우리어머니는 비녀를 보고 찾았다고 해요
2:58
너무나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그 군인들 가운데서도 걱정을 많이 하더라는 거예요 (진압군조차 두려움에 떨게 한 신전마을의 비극) 큰일났다고 자기들끼리..
3:10
그래놓고는 일부군인들은 그도 모자라서 집 있는대로 천하에 다 불을 놓고 다녔어요 (온 마을을 불바다로 만든 일부군인들) 그때 우리마을은 지금도 빈 터만 남았어요(마을은 잿더미가 되고 마을사람들은 한순간에 빈털털이가 되고 말았다) 옷가지며 식량이며 모든것이 하룻저녁에 가족이며 다 잃었어요
3:34
그게 남아있는 가족들 남아있는 마을분들이 입이있어도 말을 못하고 혼이나갔어요
3:39
( 피붙이의 처참한 죽음을 바로 눈앞에서 목도해야했던 현실) 너무나도 끔찍한 일을 당했기때문에 사람이 혼이나가.. 집이있어 먹을것이 있어.. 시체들을 땅에다 묻어야 되는데 다 불을 태웠으니 그 묻을 삽 괭이 이런것마저 없어져서
4:00
(마을에는 무덤을 팔 삽하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연장을 빌리고 인부를 사고 마을사람들이 혼이 나가버렸기 때문에
4:12
(거짓말 같은 현실앞에 넋이 나간 마을사람들) 그 피해를 안본사람들이라도 할수있는게 없어서 그래서 이웃마을에 가서 인부가 오고..
4:23
(집 마당엔 22명의 피가 낭자했고)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고 사람을 태웠으니 그 피비린내, 사람탄냄새가
4:34
(온마을은 죽음의 냄새로 뒤덮였다) 어떻게 코에 역겨웠던지 이 마을앞에 코를 들고 다니기가 힘들정도로...
4:45
(그후 마을에선)빨갱이에 빨자 순사에 순자만 들어도 몸서리를 치고..
4:51
김득중 국사편천위원회 편사연구관 - (희생된 사람들이)빨갱이 였기때문에 죽인것이 아니라 죽인다음에 그들에게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였죠
4:58
한홍구 역사학자 / 성공회대교수 -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힌순간 우리사회에서 제거해야할 대상이 되는거죠 빨갱이 가족이라고 하면 입 다물고 살았어야 했고 연좌제라든가, 신원조회라든가 그런게 (그동안 우리사회에서)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까
5:12
한글도 깨우치지 못하고,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분들이 빨갱이가 뭔지 좌익이 뭔지 우익이 뭔지 뭘알겠습니까
5:18
우리마을은 그때부터 추석이 없어졌습니다. 한집 건너 한집이 제삿집이였고.. 집집마다 울음소리가 들리는 추석이 되어버렸어요..
5:31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마을을 떠나갔다)
5:35
신전마을 주민이었던 홍동호씨는 저보다 네살이 위입니다. 위인데 그분은 아버지, 어머니, 누나, 동생.. 동생이 겨우 3살이였는데 4명을 잃어버리고 7살에 혼자남았어요
5:50
(한순간에 고아가 된 소년) 거지생활을 했어요 밥얻어먹다가 조금 크니까 쓰레기 줍는 넝마지.. 청년기때에는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내가 뭣을 보고 사냐
6:07
세번을 자살기도 했는데 곧 죽을 순간에 등산객이 구해주고 살았어요.. 좀 남들처럼 살아보려고 갖은 고생을 다 해서 몸이 망가져서 아파서 작년에 돌아가셨습니다. (혈혈단신으로 마을을 떠났던 홍동호씨는 지난해 고인이 되셨다)
6:25
이영일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소장 - 젊은이들이 취업이 안되요 중동에 취업은 안되는데 월남전 파병은 선뜻 받아주는걸 보면서 유족들이 '중동에는 돈벌러가는곳이라 (안됐고) 월남전은 죽으러 갈수도 있는 자리니 허용해준 것이다'
6:49
라는 이야기가 유족들의 아픔과 애환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족들 대부분이 못입고 못배우고 못먹는 3무 상황에서 사회적 약자로 전락하는 비참한 상황들에 처해지게 됐습니다.
7:13
(신전마을 초입에 방치된 여순사건 표지판처럼 점점 잊혀져가는 그날의 기억 하지만 장홍석씨에겐 어머니를 떠올리게하는 단 하나의 흔적이다. )
7:30
우선 많이 보고싶었다고 얘기하고 싶고요.. 또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억울한 누명으로 비명에 가신 나의 어머니... 지금 민주화가 된 이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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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정부가 있다고 하는데도 그런 사건을 지금도 외면을 하고(여순사건의 실체가 외면당하는 뼈아픈 현실...)
8:12
나몰라라 하고 그런 것들을 우리 자식들이 우리 이웃들이(자식으로서.. 그아픔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8:21
그거 하나 지금까지 해결하지도 못하고 이런 긴긴 세월을 보내는 것이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여순사건에 대한 의견과 피해사례 제보, 본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소감을 보내주시면 향후 제작에 반영하겠습니다 .여수 mbc홈페이지 시청자의견 게시판 / 여수mbc페이스북으로 많은 참여 바랍니다.
8:46
부용산 - 박기동 작사, 안성현 작곡, 윤선애 노래 / 요절한 여동생을 부용산에 묻은 슬픔을 표현한 시에 곡을 붙임 빨치산이 즐겨 불렀다하여 금지곡으로 취급받은 노래
부용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채 시든 장미는 흙으로 돌아갔네
제작지원 gs칼텍스, LG화학, LOTTE ADVANCED MATERIALS
기획 김지홍 / 구성 이혜련, 정안형 / 카메라 송정혁, 최재훈, 신대호 / 오디오 양원석, 임솔빛, 장대은
운전 김득중, 옥지수 / 음악 이수환 / 사진 고 이경모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 자료협조 제주MBC
타이틀그래픽 최윤정 / 행정 문은호, 신진영, 이가영
연출 이동신
제작 여수mbc
1948.10.19 여순사건 70주기 특별기획 가려진 시간, 고여 있는 눈물 2부 추석없는 마을link|https://www.youtube.com/watch?v=3kzgSGPbvE0|[여순사건 70주기 특별기획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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