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중기 이순신이 임진왜란을 대비하여 전라남도 여수시 종화동에 축조한 쇠사슬로 만든 방비시설

  • 바다 한가운데 보이는 수중성 모습장군도 옆 수중성
  • 수중성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돌길 모습장군도 옆 수중성
  • 철쇄방비시설 모형이 전시되어 있는 모습철쇄방비시설 모형
  • 전시되어있는 철쇄방비시설 모형철쇄방비시설 모형

건립경위

전라좌수영 앞 수로는 왜구의 통행이 빈번했던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약 100여 년 전인 1497년에도 장군도와 돌산도 사이에 방비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장군도와 돌산도 사이의 수로를 자연석으로 막아 왜구의 야간 통행을 차단한 수중 석성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장군도 정상에는 이를 기념하는 방왜축제비가 서 있다.

철쇄방비시설은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2월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다가올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 대비해 구축한 방비시설 중 하나이다. 즉,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상하고 만든 방비시설로서 왜구가 야간에 좁은 수로를 지날 때 쇠사슬에 걸려 피해를 입도록 한 것이다.

위치

철쇄방비시설은 전라좌수영의 동편 해상 입구, 즉 종포 끝머리에서 건너편 돌산도까지 설치되어 있다.

형태

종포에 설치된 철쇄방비시설과 관련된 기록은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남아 있다. 쇠사슬을 건너 매는 데에는 쇠사슬, 구멍 뚫린 크고 작은 돌, 쇠사슬에 꿰매는 긴 나무가 필요했다. 이 재료들을 이용하여 먼저 긴 쇠사슬의 중간 중간에 큰 나무를 꿰어 부표(浮標)의 기능을 발휘하게 하고, 이런 쇠사슬을 수로에 가로 질러 횡설(橫設)한 후, 이것이 조류에 떠내려가지 못하도록 다시 수면 아래로 큰 돌을 내려 닻의 역할을 하게 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 사이에는 아군 병선(兵船)이 출입하는 입구는 터놓고, 왜적은 이런 출입구를 쉽게 찾지 못하게 하며, 야간에 이곳을 지나가는 적선(賊船)은 모두 키가 부러져 그 기능이 상실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난중일기 (亂中日記)]
  • [이충무공전서 (李忠武公全書)]
  • [여수·여천향토지] (여수·여천향토지편찬위원회, 1982)
  • 이종범 외, [여수시의 문화유적] (여수시·조선대학교박물관, 2000)
  • [여수시 문화재도록] (여수지역사회연구소,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