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특별기획 증인] #3 장두웅 인터뷰

날짜
2021.12.06 12:04
조회수
239
등록자
윤성현
여수10.19 특별법 제정 촉구 특별기획 증인 여수mbc
세번째 장두웅 1943년 9월 15일생 국민보도연맹 애기섬 희생자 유족

Q)아버지는 어떤분이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부잣집아들이야. 그래놓으니까 초등학교 때부터 남의집에 가서 하숙을 하고 학교를 다녀
집에서 걸어다닐 수 있는 초등학교가 있는데 좋은데 다닌다고 요새 사립초등학교 그런식으로 학교까지 한 삼십리 되는데 십리가면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안다니고 덕양초등학교를 졸업해서 그때는 순천 매산학교, 매산학교를 다녔어 그래서 거기서 졸업하고 중초등학교 선생님도 하고 그랬어. 선생님도 좀 했어
보통학교 선생님인가 했어 그때 배운사람 축에 들어가지. 일자무식은 아니라 매산학교 출신이니까. 우리 어렸을때 집에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니야. 청진 비료공장에서도 근무하고, 군청에서도 근무했다고 그러는데.. 배운사람이라서 나중에 알고 보니까 삼일면 청년회장 하고 그랬다더만

Q)아버지와는 언제 헤어지셨어요?
지금 말하면 6살인데 지금처럼 텔레비전도 없고, 없잖아요 그거(여순사건) 난지도 몰라. 여기까지가 한 50리란 말입니다. 여수시내에서.
하루는 그때 가을걷이를 했어요 (벼를 모으는데) 동네사람들 전부 다 나오라고 그래. 동네사람들 다 악을 쓰고 그러니까 쫓아나갔지 작으니까 뭔지도 모르고 그냥 따라간거야 동네사람들 다 모였는데 아버지는 거기에 없었던가봐 아버지는 없고 어머니하고 동생하고 우리 식구 세식구니까.. 머슴사는 사람 있었고 일본놈 칼 가지고 딱 하니까 이쪽 눈인가 이쪽눈인가 잘 몰라. 여기에 피가 흘러. 사촌형님이.. 그래서 있는데 우리 큰집하고 우리집하고 거기 큰집하고 다섯집인가 네집인가 불을, 경찰들이 불을 질렀어.
불을 질렀는데 수저하나도 못꺼내고 전부 다 입은 옷 그거밖에 없으니까.. 가을걷이를 빨리 해놓으니까 창고에 곡식 다 놓고 그러잖아요 광에.. 가을이 됐으니까 그러는데 경찰들이 불을 지르니까 끌어가지도 못하고 홀랑 다 태워버리니까 입을 옷이 단 이것밖에 없는거야 살림살이가 없어. 수저가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아버지는 피해버렸는가 없고 큰아버지가 숟가락도 줬을 것이고, 지금 생각하면 밥그릇을 줬을거아닙니까. 중부님이 밥도 먹였겠지 몇끼는 줬을 거 아니오 나가능이야. 지금 자기네 조카가 굶고 있는데 자기들만 잡수겠습니까 도리상. 빚을 내서 먹었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고 그리 살았는데.. 아버지 간 뒤에 아버지 오는가 보려고 경찰서에서 날마다 집으로 와. 아침밥먹을때 들어올때도 있고, 저녁밥 먹을때 올때도 있고, 새벽에도 들어올때가 있었어 잡아가려고.

Q)그뒤로는 못만나셨어요?
지금생각해보니까 자수기간이 있어 죄를 없애주고 그러지 않습니까 자수기간이 있었나봐 국가적으로 신문에도 나고.. 아버지가 오셨는데.. 논 서마지기 팔아서
경찰들한테 순사들한테 소 한마리 잡아주고, 돈가져다 주고..

장두웅씨의 아버지는 몇 달 뒤 여수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되었다.

지금생각하니까 국민보도연맹이 있었는지 몰라도 닷새만인가 일주일만에 한번씩 인원점검을 해 그러면 오라그러면 가고, 여수밖을 나가려면 말하자면 순천 이렇게 가려면 신고를 하고 가라고 해 5일만인가 일주일만인가 그건 똑똑히 몰라 인원점검을 해 어디 못가게. 닷새만에 어딜 가겠어. 하루는 갈날도 아니야. 말하자면 그날도 아닌데 연락이 와 인편으로 왔겠지. 와서 지서에 나오라니까 나가는데 여름이니까 지금생각하면 6.25난 뒤라 불시로 집합을 시킨거지. 아버지가 한복을 입고, 모시적삼을 입고 밭매는 길 가면서 '어이 나 지서에 갔다올라네' 그래놓고 갔단말이야. 거기서 지서에 잡아넣어 놓고 안나오니까, 배가 고프니까 인편이 와. 밥보내주라고. 우리사촌형님이 살아계시면 85살. 그때 형님이 나보다 7살 많으니까.. 15살정도 됐겠구만. 그때는 뭐 도시락 그런것도 없고, 대를 엮어가지고 손잡이가 있는게 있는데 고슬밥을 이만한 바구니, 뚜껑이 있어. 거기에 밥을 담아서 반찬도 없어서 요새 같으면 무짱아찌나 그런거 담아서 밥을 가져가는데 이틀인가 가져다 주니까 빈거를 가져다 주잖아요? 한번 가져다 주면 세끼를 잡수셔. 그런데 그냥 가져오니까 어머니가, 그건 나 기억이 똑똑히 나지. 그걸 들었으니까 "왜 너희 작은아버지 밥을 줬는데 그냥 가지고 왔냐", "밥을 가지고 갔더니 엊저녁에 여수경찰서로 다 넘어가버렸어요." 밥을 가지고 갔는데 먹을수가 없잖아. 그때는 여수를 걸어다닐때야. 그래서 그날 못가고 다음날 새벽에 일찌감치 밥을 해먹고 나가니까, 요새같으면 빨리가야 열시나, 아홉시에 갔겠지. 가니까 경찰서 문앞에 가니까 사람들이 다 나와서, 경찰서 문앞에 가니까 엊저녁에 애기섬으로 배에 싣고가서 총쏴서 애기섬 거기에 수장을 시켜버렸다. 소문이 그렇게 난거야 그뒤로 호적정리도 못하고 하면 올까올까 하다가 57년도인가 그때 사망신고를 병사로 했어. 병사로 하고.. 그 경찰에 잡혀가실 때, 우리 산촌형님도 한분 잡혀갔는데, 나는 작은아버지때문에 살았다고 배탈때 얘는 아무죄없는 놈이라고 그래서 나왔다그래

Q)시신도 못찾으셨어요?
애기섬에 수장되어서 시체를 못찾으니까 산소도 없으니까 성묘도 못가고, 벌초도 못했죠. 가족 묘지를 이쪽으로 조성하니까 다른분은 다 써졌는데 어머니만 쓸수 없잖아요. 자식이 아버지 없는 자식이 어디있겠습니까. 아버지만 안계시고 어머니만 모시려니까 이게 도저히 안되겠다. 어느자식이 아버지 없는 자식이 어디있겠습니까.

유골 항아리 있잖아요 할아버지 산소에 가서 묘앞 흙세줌담고, 할머니 선산에 가서 할머니 산소에가서 또 흙 세줌 해서 아버지 지금부터 어머니랑 같이 계십시요. 그러고 항아리를 묻어뒀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방법이 없어 그래서 아버지, 어머니 다해서 했어. 할아버지와 할머니 한테서 낳았으니까 모시고 지금 해놨어요.

Q)어떻게 사셨어요?
어렸을때부터 푸대접은... 큰집이 잘살고, 동네를 좌우하니까 간간히 빨갱이 자식이라는 소리는 내귀로도 들었어. 안들은것은 아니야 그래도 외롭게 크고 그러진 않았어. 우리때는 밥을 얻어먹고 그런사람들이 많았는데 아침에 일해주고 밥먹는 사람들이 많아. 먹고살아야 하니까 그런데 어릴때부터 배곯고 그러지는 않고 쌀, 보리 우리집에 쟁여놓고 살았지.. 모심을때 일해주겠습니다. 보리벨때 일해주겠습니다.(하면서) 양식가지러오는 사람들이 많아. 그때 먹여주고 다 해주지. 그래서 고생은 덜 했지. 어머니가 애를 많이 썼으니까.. 우리 어머니 35살때고, 우리 아버지 33살에 희생됐거든? 요새같으면 시집도 안간 사람이 많아. 어머니가 고생을 해서 혼자살면서 욕안먹게. 바람피우고 그런게 아니라 재혼안하고 아들 둘이 보고 고생하며 살면서 그렇게 한이 됐다. 그런데 좋은 세상도 못보고 돌아가셨다고 내가 그렇게 이야기를 했지.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했어.

Q)학교는 몇살까지 다니셨어요?
그때만 해도 어머니 생각에 많이 배우면 죽는다 이거야. 안배우는게 좋지, 배우는게 좋은것이다. 그렇게 생각안해 어머니 말씀이.. 이승만 정권이 원수다. 죄도없는사람을 왜.. 그렇게 어머니는 이야기 하고.. 배우면 안된다고 조금만 해라 그래서 내가 대학교도 가려고 하면 갔을것인데..

Q)여수국민보도연맹 사건소송대표를 맡으셨죠?
나는 신문을 어렸을때 부터 봤거든? 군대가기전부터 봤는데 군대 다녀와서 동아일보를 계속 보다가 지금 한겨례 창간할 때 부터 지금까지 보고있어. 그러니까 과거사법을 알아. 신문을 보고 신고하는걸 알거 아니 라고. 네기 여수희생자 유족이니까 여수유족회를 가서 보니까 유족회 나오는 사람들보니까, 보도연맹 유족만 13명인가돼.
같이 제사모시는 사람이. 한번에 제사모시는 사람이. 과거사에서 조사관들이 사살한 사람들을 다 인터뷰 해놨거든. 1950년 애기섬 1차가 7월 16일 밤에 사살한거야 100명 내지 150명, 180명 사살했다는데 1차, 2차, 3차라는데 우리 아버지는 1차라. 첫날저녁 그때 우리집이 음력 초하룻날 제사를 모시는데 사살한 사람들이 조사를 해놓고 보니까 딱 맞아. 1950년 7월 16일이니까 음력 초하룻날로 딱 맞는 거라. 지금도 우리 유족이 13명인가 하룻저녁에 제사를 모셔. 그렇게 많아. 그래서 이제 신문을 보고 그러니까 울산에서는 재판하고 그러니까 우리도 해보자. 장환익 변호사가 맡아서 한거야. 원고 여수보도연맹사건 대표 장두웅, 피고는 대한민국, 그렇게 쓰더라고.

희생자 8천만원, 배우자 4천만원 그다음에 아들딸들 1인당 8백만원 그렇게 됐어 그렇게 해서 다행이 승소를 했는데 한가지 연 이자가 20%인가 돼. 그거 해서 내가 1억 8백만원인가 됐는데 이자가 2천5백만원인가 나왔더라고 유족회에 204만원 기금으로 납부했고

Q)소원이 있다면?
나이가 많아서 여든 살 넘은 사람이 많아요. 살아계실때 특별법을 만들어서 소송도 해서 승소를 해야지 조금이라도 마음이라도 편히 먼데 갈때 내가 아버지한테 그래도 할것은 했다. 명예회복은 해줬다는 그 마음을 갖게.. 특별법이 하루라도 빨리 올해 꼭 21대 국회에서 꼭 통과됐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야 이제 기념관도 짖고 위령탑도 모시고 그래서 우리는 어느정도 명예회복이 됐다고 보는데 안한 사람들이 너무나 안타까운사람들이 많아요
(특별법 제정되면 유족분들이 더 가입을 많이할거라고 생각하세요?)
아주 많이 할겁니다. 1천명도 더할것같아..

제21대 국회에서는 여순 10.19특별법이 제정되길 소망합니다.

여수10.19 특별법제정촉구 특별기획 증인 여수MBC
(본 영상은 마포꽃점 폰트로 제작되었습니다.)
이 표는 동영상 게시판 상세 내용을 제공하며 저자명, 생산연도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저자명 여수mbc
생산연도 2020.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