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특별기획 증인] #2 김우송 인터뷰

날짜
2021.12.06 11:39
조회수
216
등록자
윤성현
여수10.19 특별법 제정 촉구 특별기획 증인 여수mbc
두번째 유족 김우송 1942년 9월 25일생 국민보도연맹 신강수도 희생자 아들

Q)아버지는 어떤분이셨어요?
어부였어요. 어부였는데 참 유식한 분이고 또 씨름선수였어요. 씨름해서 소도타고 그런분이야 아버지는 참 돌아가시기 아까운 분이였어. 면에 가면 면 서기들한테 나지금 호적등본 띠러왔네 그러고 가서 자기가 떼어 가지고와서, 호적등본 가지고 와서 열람해서 등사해서 오고.. 면 서기들이 가만히 놔두고 오고 그랬어. 내가 11살때 아버지가 멍석을 만들었거든 멍석을 만드는데 빨리 하려니까 짚을 세개씩 가려서 아버지 손에 잡혀주고 그러면서 형네들이 와서 이야기 했던 것이 어제들은것처럼 그래
아버지가 "지금세상은 벙어리가 살고, 봉사가 사는세상이다. 남모를 사람들이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해도 가르쳐주지 말고, 벙어리처럼 살아라" 했는데 이렇게 될줄 몰랐죠.
Q)아버지와 어떻게 헤어지셨나요?
11살때 아버지가 35살이라 할아버지 제사다음날이라. 어제 제사지내면서 잠을 못잤으니까 일찍 자자고 그랬는데 느닷없이 경찰들이 와서 연행해 가면서 줄로 꽁꽁묶어서.. 고기 낚는 줄로 꽁꽁묶어서 가니까 집안이 난리가 났을거 아닙니까. 할머니, 어머니 모두 울음바다가 됐죠. "나죄지은거 없으니까 걱정하지마라. 나 다시 돌아올것이다. 바른대로 이야기하면 다시 돌아올것이다." 한것이 마지막이였어요

Q)아버지의 죄명은 뭐였나요?
김유종이 큰아버지예요. 유종이, 유일이, 유삼이, 유곤이 이렇게 유 자돌림으로 되어있어. 그런데 이제 큰아버지가 유종인데, 큰아들이 김주은, 큰아들이라. 그러니까 형님이지. 김주은하고 오정민이가 남면 면사무소를 가는데, 거기 미친 고랑이라고 있습니다. 그늘이 좋고, 바위가 있어 거기서 쉬고있는데 이상한 사람들이 밀대 멍석을 멘 사람들이 산에서 나와서 "학생들 어디가?", "우리 면사무소 갑니다" "나 인솔좀 해줄수있어?" 가는 걸음이니까 가니까 김주은이, 유종이 아들, 오채근이 아들 오정민이가 인민군들을 인솔해 왔더라 결국은 밀대망석에 총이 있었어. 그사람들이 인민군이였어.

김우송씨의 사촌형 김주은과 그의 친구 오정민은 인민군의 앞잡이라는 오명을 썼다. 6.25이후 인민군을 색출하러 온 군인들은 도망친 사촌형 대신 큰아버지인 김유종을 잡아가려 했다.

인천상륙작전 때 해병들이 내려왔어. 내려왔어 그당시 인민군에 가담한 사람들을 색출하는거야. 연행하러 온것이, 김유종을 잡으러 온것이 김유곤 우리아버지를 잡아가버렸단 말이야. 그런 억울함을 당했다고 아버지 보고 "네가 인민군 앞잡이 인솔을 했냐?" 고 하는 질문 한번도 없이 그냥 손발 묶어서 수장을 시켜버렸어.

여수 남면에 사는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들은 1950년 7월 23일 신갱이또라고 불리는 남면 안도와 연도 사이의 신강수도에서 사살되었다.
김우송씨는 아버지의 수장소식을 함께 잡혀갔다 간신히 도망쳐 돌아온 이웃으로부터 들었다.

아버지를 잡아가서 지금 여기 서고지, 서고지 앞바다 신갱이또에 노줄로, 그것도 뒤로 묶어서 물에다 넣었대. 그러면 네가 그런 도둑질을 했느냐 물어보지도 않고, 묻지마 살인을 한거야. 리스트를 가지고 왔으면 리스트를 보고 확인을 해야지 "당신 김유종이 맞아?" "나는 김유곤이다" 그런 대답도 없고 무조건 놋줄로 묶어가지고 가서 여기다가 서고지하고 안도사이 신갱이또에 뭍어버렸어 그러니 어떻게 죽었을까. 죽는걸 상상하니까...코에 물이 들어왔을거 아니오? 폐까지 물이 들어왔을 거 아니오. 그걸 생각하면 이런게 올라와.

Q)유년시절은 어떠셨어요?
나는 참 더러운 세상을 살았어요. 여순사건 나면서 6.25터지고 6.25후에 흉년에 왔습니다. 먹고 사는것만 해도 참 어렵고, 논두렁의 쑥이 자라기도 전에 뜯어다가 쑥국을 해먹고.. 그런 세상을 살면서 형님은 객지 가서 돈 벌어오겠다고 나가더니 3년동안 편지 한장도 없어. 그러니까 아버지 돌아가신 뒤에 어머니 속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가장이 아닌 가장이 되었지요 이제 11살먹은 사람이 밭에가서 소를 데리고 가서 밭을 갈면 소가 찔려버려요. 받아버려요 그러지 산에가서 나무 짊어지고 오면, 아버지 지는 지게지고, 올라갈때는 목발이 안닿는데 내려올때는 닿아버리더라고. 처박혀버려. 그러면 엄마는 엄마하고 할머니는 그걸 쳐다보고 얼마나 기분이 좋겠어 울음바다야.
또 나무를 가지고 와야지 땔감을 해서 밥을 해먹고, 논밭갈고, 학교도 제대로 못다녀서 3학녀때, 3학년 방학때 그렇게 됐으니까...그러니까 사는게 사는게 아니야 취업도 못했고, 공부도 못했지, 3학년 방학때 딱 끝난거야 내인생이.

Q)취업하기도 힘드셨죠?
눈물이 날라고 그래요. 19살이 되어서 아, 나도 돈을 벌어야 겠다고 여수 남한상사라고 있었습니다. 무역회사
그리로 입사를 해서 선원수첩을 내서 일본으로라도 가야겠다. 무역선 타고 그러면 돈을 번다더라고 누가 갔는데 선원수첩을 여수항만청에서 내니까 외항불가라고 딱 빨간줄이 쳐졌어. 뭐냐 뭐때문에 외항불가냐 그러닊 6.25때, 여순사건때, 사상가진 가족이 있다. 그래서 이제 배는 포기하고 여수삼양사라고 있었습니다. 삼양사에 입사서류를 넣으니까 신원조회를 떼어와라 신원조회를 떼어가니까 신원조회도 빨갱이라고. 내가 11살 먹었는데 뭔 빨갱이 노릇을 했겠습니까. 그러니까 나는 억울해죽겠어. 나를욕심내서 취업을 같이 시키려고 하고 회사사장도 나를 욕심내서 같이 가자고 오라고 해서 서류를 해보면 그것때문에 안되고 . 그러니 돈도못벌고, 다시 집에가서 어머니 봉양을 해야겠고. 그런세상을 살았어요. 손도 관절이 왔어요 손이 이상하죠 일만일만 하고..

1988년 여수를 떠난 김우송씨는 충남 당진에서 25년을 살았다. 지난 2013년 고향에 돌아온 김 씨는 이날 취재진과 함께 처음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곳을 찾았다.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아버지의 죽음과 마주하는 일은 버거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Q)아버지 보고싶으세요?
지금 안돌아가신것같아. 내일이라도 올것같아. 아직도 돌아올것같아.

Q)거의 한 70년 가까이 지나셨잖아요 아버지 돌아가신지.. 아직도 그리우세요?
그립죠 왜냐면 나 힘들면 아버지 생각이나 내가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아마 이렇게 안살았을꺼예요. 학교도 큰 학교나오고, 가방끈도 튼튼했을 것이고 그러니 어디가서 뭘 하려고 하면 가방끈이.. 영어가 나오잖아요 그것도 어려워. 대기업들은 영어로 다내고. 컴퓨터 이제 다음 9월인가에는 컴퓨터 학원에 다녀볼까 해. 컴퓨터를 배워볼까. 생각중이야

Q)소원이 있다면?
아버지의 명예훼손. 우리 형제들 취업도 못하고 손해배상이라든지 명예회복, 이것이 회복이 되어야지 안되겠습니까.

Q)그때 2009년 이였나요? 진실과 화해 과거사 위원회 그때 당시에는 어떻게 보상같은거 받으신건 없으세요?
없어 (전혀없으세요? 살면서 지금까지? ) 없어 아직까지 보상받은것 전혀없고 아버지가 인민군 앞잡이 노릇을 했다면 억울하지도 않지. 큰아버지 아들을 잡으러 왔는데 엉뚱한 아버지를 잡아서 갔으니 얼마나 피가 터질 일이오. 이승만 정권이 원망스럽고, 다시 돌아오면 내가 할말을 했으면 해.
(어떤말씀을 하고싶으세요?) 왜 자초지종도 묻지 않고, 묻지마 살인을 했냐.
네가 빨강이 앞잡이를 했냐. 한마디라도 해야할 것 아닙니까 무조건 가서 이름이 비슷하다고 묶어서 쳐넣는 어디그런 나쁜사람들이 있어.

명예회복, 보상, 이것만 있으면 멍들어 있는 가슴이 조금 풀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입니다.
제21대 국회에서는 여순 10.19특별법이 제정되길 소망합니다.

여수10.19 특별법제정촉구 특별기획 증인 여수MBC
(본 영상은 마포꽃점 폰트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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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명 여수mbc
생산연도 2020.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