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70주년 특집 5부작 <가려진 시간, 고여 있는 눈물> 4부

날짜
2021.10.13 14:03
조회수
302
등록자
윤성현
여순사건 70주기 특별기획 가려진 시간, 고여있는 눈물
4부 70년의 악몽
(전남 여수시 삼일동 - 70년전 호명마을의 참혹했던 늦가을.. 진압군에 의한 협력자 색출작업이 벌어지고 모진 고문과 매질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던 사람들.. 그 후유증으로 마흔을 넘기지 못한채 세상을 등진 이들이 많았다.. 여순 사건은 주민들에게 여전히 치유되지 않는 상처)
주민 - "지긋지긋해서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이영일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소장 - 저희들이 97년 조사당시에 인터뷰 성공률이 10분의 1이었습니다. (인터뷰에)응하지를 않죠. 이후에 어떤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함 때문에..
이영문 정신과 전문의 / 서울시 공공보건의료재단 대표 - (국가폭력은)실체를 알 수 없는데 그게 거대한 힘으로 억누르니까 알수없는것에서 압박을 받으니까 대항할 수도 없는거예요 캄캄한 어둠속에서 총격전이 벌어진것과 같은 상태인거죠 (아군과 적군의) 구분이 전혀 안되는 상태에서 받는 상처라 온통 세상이 적으로 보일 것이고 그런 마음상태가 읽혀요 국가가 사소한 거라도 국민들에 대한 억압이나 폭력이 있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70년 전 여수에 휘몰아친 거대한 국가폭력의 소용돌이는 이유도 명분도 없이 국민들의 목숨을 빼앗아 갔다. 진압군의 명령으로 여수서국민학교에 모이는 시민들
이어진 협력자 색출작업 오른쪽 대열은 부역혐의자로 분류된 사람들 이들 중 89명 11월 1일 처형...

김천우 종산국민학교 협력자 색출 목격 / 여순사건 당시 8세 - (집)문이 부서지다시피 해서 뛰쳐나오니까 (군인들이) '다 손들고 나와라'한 겁니다. 끌려간 학교 운동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우리가 끝머리 가서 앉았습니다. 해가 뜨니까 (한숨) 그.. 순경들 사찰계 형사들 민간복장을 하고 또 군인들이 뒤에 한 세명 두명이 따라다니면서 그 앞에 가신분들이 손짓을 하면 군인들이 끌고 나갔습니다. 줄지어 앉은 사람들에게 가해진 명령 다섯명씩 해서 줄지어 앉았었는데 윗옷을 벗어봐라 아랫도리를 내려봐 손도봐요 손가락끝에 기름기 묻은 사람 그런사람들 끄집어 내서 끌어앉히는 거예요"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 머리가 짧거나 군용팬티를 입은 사람은 14연대 군인으로 간주해 버렸던거죠 또 흰고무신을 신은 사람들(이 협력자로 분류된 이유는)은 천일고무라는 회사가 있었습니다. 천일고무 사장이 김영준이라는 한민당의 (여수)지부장이었습니다. 봉기군이 여수를 점령한 다음에 흰 고무신을 일부 주민들에게 나눠줬습니다. 흰 고무신을 신은 사람들은 반란군에 협조한 것이다 라고 바로 간주해 버렸습니다.

김천우 종산국민학교 협력자 색출 목격 / 여순사건 당시 8세 - (운동장에)세워놓고 총살을 한겁니다. 많게는 일곱명, 다섯명, 세명, 두명 이런식으로 순서없이 쏴죽이는 거예요 그러면 그 앉아있던 사람이 (극도의 공포속에 시신운반까지 해야했던 사람들) 앞에 손들고 뒤에 발들고 해서 계단 한 여덜계단인가 올라가면 벚꽃나무 밑이 있어요 거기에 구덩이를 파고 사람을 던져놓고 와요 그러면 그사람이 또죽어요. 그런식으로... 한 다섯시 이후에 찬바람이 부는거예요 (저녁 어스름이 내리고 추위에 떨던 사람들) 사람들이 떨고 움츠러드니까 나중에는 방을 정하기를 남자가.. 나는 여자측에 들어갔어요 교실에서 잠을 잤어요 그러다가 자다가 시끄러워 일어나보니 왜냐하니까 그안에서 교실에서 아기를 낳았어요 아침 8시경에 집으로 돌려보내요.. (그러나 끝나지 않은 악몽 큰형의 실종..) 며칠후에 제 형수되는 사람의 오빠두분이 그런 계통에 있었다 (처가의 좌익혐의때문에 고문받고) 그사람들 찾아내라.. 초주검이 되어 가족이 머물렀던 우리가 잤던 방.. 교실로 끌려간 형. 어머니가 그뒷날부터 찰밥을 했어요 찰밥을 그날로 아침에 가져가 보니까 윤천형님은 아침에 실려나갔습니다.." (형제묘 / 전남 여수시 만흥동)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된 부역혐의자중 125명이 희생된 자리에 세워진 형제묘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의지하라는 뜻으로 유족들이 조성..

반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잡혀온 여수여학생들
여순사건 가담학교 10개교 여수중, 여수여중, 순천중, 광양중, 벌교중, 고흥중 등 가담학생 280명 1948년 11월 30일 전남학무국 발표
홍석초 여순사건 당시 여수중 3학년 - "서국민학교에 여수시민을 몰아넣었을때 학생들이 특히 많이 죽었습니다. 우리반에 반을 운영할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우리위로 4학년 다니다가 우리반이 싹 없어졌습니다. (졸업장조차 받을 수 없었던 서러운기억) 그때 여수학생들 무지하게 죽었습니다."
(전남구례군 산동면) 진압군과 빨치산(반군)이 출동한 지리산 아래 산동마을 빨치산에게 패한 진압군의 울분은 죄없는 마을사람들에게로.. 진압군의 명령으로 젊은이들은 구덩이를 파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을사람들은 극도의 공포에 떨었습니다.
한준희 여순사건 당시 9세 - "(구덩이를)파는 이유도 몰랐지 나중에 알고보니까 총살해서 사람들을 묻어버리려고 판거였어 이게 한 몇분만 늦었더라도 다 죽었어..
(그 사실을 안 경찰서장의 제지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사람들) 누가 물어보면 모른다고 해라 (그 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 '나는 몰라요') 그것이 어른들이 하는말.. 모른다.. "
홍순례 여순사건당시 9세 - "시아버지가 나보고 이야기를 하셔. '나는 뒤에앉아서 용케 살았다.' (눈앞에서 죽음을 목격한 시아버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으나 풍비박산이 난 마을)"
조순남 여순사건당시 8세 - "탑동사람들, 똑똑한 사람들은 다 죽었어"
(전남여수시 삼일동)
홍양수 여순사건당시 11세 - "배운사람들은 다 좌익사상이야. 다죽었어 다"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 진압과정에서 젊은층이 많이 희생이 되었습니다. 사회에서 버팀목이 되는 젊은 소장층이 여순사건을 통해 증발하다시피 한 겁니다.
이후에 지역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잃어버린 것이죠

박병섭 순천여고 역사교사 / 여순사건구술 수집 - 여순사건때 인재로 평가받는 분들이 일거에 제거되면서 나머지 민중들이 볼때는 앞선사람, 똑똑한 사람, 학식이 많은 사람들은 모조리 제거된 거예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결국 그런사람들의 전철을 밟지 말아라 그러하니 아무리 나서고 싶은 상황에도 절대로 나서면 안돼 라는 것을 가정에서 주입하게 된거거든요.
주철희 역사연구자 - 이웃도 믿지못하는, 이웃의 눈치를 봐야하는 그 이유가 여순사건이 발발한 이후 운동장에 모아놓고 손가락 총을 이용해서 협력자를 색출해내죠.
(*손가락총 : 손가락으로 지목하면 재판없이 즉결처분 ) 협력자를 색출한 사람들은 개인적 감정으로 색출해서 형장의 이슬로 몰아넣었거든요

박병섭 순천여고 역사교사 / 여순사건구술 수집- 구술을 수집하면서 이런 사례를 봤어요 14연대 군인이예요. 봉기를 했어요. 그런데 국가가 당시에 '자수하면 모든것을 용서해준다'고 이야기를 한거예요 문제는 자기가 권유해서 자수한 친구가 결국 희생을 당해버린 거예요 그분은 차라리 자기가 국가를 믿고 자수하란 말을 안했으면 그친구가 살아남았을 건데..(라는 자책을 했죠) 같은 마을 사람이예요 그런데 자기가 나라를 믿고 자수하자고 권유해서 그사람이 죽게된게 평생 한이 됐다는거예요

70년동안 고문후유증에 시달려온 구례의 이윤재 어르신 그날의 기억을 잊을수없어 고통스럽습니다..
이윤재 어르신 여순사건 당시 19세 - "지금도 그런걸 생각하면 아슬아슬해요. 꿈에도 나와요 꿈을 꾸고나면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악몽..) 어떻게 살아났는지 곰곰히 생각하다가 잠을 못잘때가 있어..

김천우 종산국민학교 협력자 색출 목격 여순사건 당시 8세 - 자다가도 앞에서 쏴죽이는게(생각나요) 몇백명을 쏴 죽이는걸 내눈으로 봤으니까요 그현장에서 목격한 그것이 형의 죽음이예요 (형의 죽음으로 인해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된 고통) 내가 고통받았던 일. 그런일들이 엄습해 오니까 잊을수가 없어요 하루도.. 잠자다가 꿈에도 총살당한 모습들, 자빠지는 모습, 죽어가는 모습..
이영문 정신과 전문의 서울시 공공보건의료재단 대표 - 국가폭력은 어쩔수 없는게 아니라 우리가 세금을 내고 일을 함으로써 국가가 성립된 건데 (국가를)만들어준 주인을 학대를 하고 트라우마를 주는 거니까 더 억울하고 대항하려해도 실체가 없으니까(두렵고) 완전히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면서 분노하게 만드는 가장 나쁜 트라우마라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국가폭력 트라우마는 사라지기 힘들다. 진심어린 사과와 보상이 트라우마 치료의 첫 단계이다. ) 이분들의 잃어버린 70년에 대한 것을 보듬어 줄 수 있는 무언가가 같이 논의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전하고 싶습니다.

여순사건에 대한 의견과 피해사례 제보, 본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소감을 보내주시면 향후 제작에 반영하겠습니다. 여수mbc홈페이지 시청자 의견 게시판 / 여수mbc 페이스북으로 많은 참여바랍니다.

(종고산에서 바라본 여수)
여수블루스 - 강석오 작사, 박양희 편곡, 전인삼 노래 / 여순사건의 비극을 담은 곡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숨죽이며 불렀던 노래로 악보도 없이 구전으로 전해졌다.
(1940년대 여수)
여수는 항구였다 철썩철썩 파도치는 남쪽의 항구 어버이 혼이 우는 빈터에 서서 옛날을 불러봐도 옛날을 불러봐도 재만 남은 이거리에 부슬부슬 궂은비만 내리네
제작지원 gs칼텍스, LG화학, LOTTE ADVANCED MATERIALS
기획 김지홍 구성 이혜련, 정안형
카메라 송정혁, 정연우, 최유진, 최재훈, 신대호 오디오 양원석, 임솔빛
운전 김득중, 옥지수 음악 이수환 사진 고 이경모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여수시
자료협조 제주MBC,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
타이틀, 그래픽 최윤정 행정 문은호, 신진영, 이가영
연출 이동신 / 제작 여수MBC
4부 70년의 악몽
여순사건 70주기 특별기획 가려진 시간, 고여있는 눈물 월~목 저녁 7시 5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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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