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본영으로 사용 조선수군 구국역사의 상징

진남관 복원공사로 인한 관람 중지 안내

  • 진남관 관람은 보수정비사업으로 2024년 말경까지 관람이 제한됩니다.
  • 둘째·넷째 주 토요일 10시. 14시 보수현장 관람 실시 (여수시OK통합예약시스템 사전 예약)

조선시대 400년간 수군의 본거지였던 여수

국보 제304호인 진남관은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해에 세운 단층목조 건물로 구국의 상징이자 역사의 현장으로 여수의 상징입니다.
진남관 정문 역할을 하고 있는 2층 누각 망해루는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으나 복원되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사용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삼았던 진해루가 있던 자리에 1599년 충무공 이순신 후임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이시언이 정유재란때 불타버린 진해루터에 75칸의 대규모 객사를 세우고, 남쪽의 왜구를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진남관(鎭南館)이라고 이름 지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수군 중심 기지로서의역사성과 1718년(숙종44년) 전라좌수사 이제면이 중창한 당시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다. 건물 규모가 정면 15칸, 측면 5칸, 건물면적 240평으로 현존하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대 규모이다. 정면 15칸, 측면 5칸 총 75칸이 되는 건물은 우리나라에서 사찰이나 화랑, 궁전의 행랑, 종묘의 정전 같은 건물을 제외하고는 합천 해인사의 경판고와 진남관 단 두 곳뿐이다.

진남관의 평면은 68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었는데 동·서측 각각 2번째 협 칸의 전면 내진주를 이주(移柱)하여 내진주 앞쪽에 고주(高柱)로 처리하였다. 이 고주는 곧바로 종보를 받치고 있고 대량은 맞보로 고주에 결구하여 그 위에 퇴보를 걸었다. 전후면의 내진주와 외진주 사이에는 간단한 형태의 퇴량을 결구하였고 측면의 칸에는 2개의 충량을 두어 그 머리는 내부 대량위로 빠져나와 용두로 마감되었다. 기둥의 민흘림 수법을 보여 주고 있으며, 그 위에 짜여진 포작은 외부로는 출목 첨차가 있는 2출목의 다포계 수법을 보이고, 내부에서는 출목첨차를 생략하고 살미로만 중첩되게 짜서 익공계 포작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외부출목에 사용된 첨차에는 화려한 연꽃 봉우리 문양 장식을 가미하였고 특히 정면 어칸 기둥과 우주에는 용머리 장식의 익공공법을 사용하였다. 각 주칸에는 1구씩의 화려한 화반을 배열하여 건물의 입면공간을 살려주고 있으며, 내·외부 및 각 부재에는 당시의 단청문양도 대부분 잘 남아 있다. 또한 건물 내부공간을 크게 하기 위하여 건물 양측의 기둥인 고주(高柱)를 뒤로 옮기는 수법을 사용하여 공간의 효율성을 살리고, 가구는 간결하면서도 건실한 부재를 사용하여 건물의 웅장함을 더해주고 있다.

건물의 양 측면에는 2개의 충량(측면보)을 걸어 매우 안정된 기법을 구사하고 있는 등 18세기 초에 건립된 건물이지만 당시의 역사적 의의와 함께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진남관 내부전경

멀리서 본 진남관 전경

국보 제304호로 지정

객사의 용도로 이용된 진남관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됐다가 후에 그 중요성과 가치가 인정되어 2001년 국보 제304호로 지정되었다
진남관 뜰 안에 세워져 있는 석인상도 유명하다.

돌로 만든 석인상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여수는 임진왜란 대 수군의 격전지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사로 있던 전라좌수영은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 역시 그와 인연이 깊은 유물이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한창 제작할 시기에 왜구의 공격이 심해지자 이를 막기 위해 7개의 석인(돌사람)을 만들어 사람처럼 세워 놓았는데, 이로써 적의 눈을 속이어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되었다 한다.

진남관 뜰안에 세워져 있는 석인

진남관 전경

진남관 야경

원래의 7기 중에서 지금은 이것 하나만 남아있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손은 팔짱을 꼈으며 그 위로 도포자락이 늘어져 있으며 시선은 유유히 적을 바라다보는 듯하다.
소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위치

주소 : 전라남도 여수시 동문로 11 망해루